남메아리
(재즈 피아니스트)

“레이 찰스가 연주하는 노트들의 계이름은 음계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카피가 가능하다. 그러나 레이의 소울, 터치, 필링은 노트 너머에 강력하게 존재하지만 계이름처럼 명확하게 알아내기 힘들다. 지금이라는 시공간을 흔들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닿게 해 주는 레이의 울림은 도대체 무엇일까?”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다큐멘터리 <Piano Blues>(2003) 중 레이 찰스의 연주 




요즘은 어떤 음악을 듣고 사는가?


음악을 잡식으로 듣는다. 책 보다가 누구 이름이 나오면 그 사람 앨범을 막 찾아보다가, 갑자기 또 초창기 재즈 음악이 궁금해서 스캇 조플린(Scott Joplin)을 찾아 듣거나, 그런 식이다.

그럼 최근에 듣는 소리보다 좀더 과거로 가서 잊을 수 없는 소리 경험이 있다면 몇 가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앨범을 듣다가도 결국 돌아가게 되는 앨범이 있다. 나에게는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다. 특히 스티비 원더의 〈파워 플라워(Power Flower)〉라는 곡이 그렇다. 나도 왜 항상 거기로 돌아가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음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특별한가? 멜로디? 화성? 녹음될 때의 질감?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나에게는 울림인 거 같다. 어떤 곡 자체가 가진 울림. 그게 뭘까 계속 궁금해하면서 돌아가는 것 같다. 내가 녹음한 곡 중에 〈쉬즈 고타 해브 잇(She’s Gotta Have it)〉이 있는데, 그게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온 거다.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뭐랄까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있는데, 도대체 그 소리의 출처가 뭐길래 나에게 계속 이런 울림을 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음악을 들을 때도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

처음 악기를 시작한 건 언제인가?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접했다. 작은 업라이트 피아노 위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넘어 다니고 그렇게 악기랑 놀면서 친해졌다. 

악기랑 놀다니, 배우는 데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 잠깐 다녔는데, 악기를 발로 차면서 정말 하기 싫어했다. 


배울 때는 나도 엄마한테 자로 맞으면서 배우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감사하다. 연습을 다 끝내야만 놀 수가 있었는데, 빨리 놀고 싶어서 울면서 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악기가 정말 싫어질 수도 있지 않나? 악기를 좋아하게 된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가?


중간에 악기를 바꾼 적이 있는데, 그게 계기인 것 같다. 피아노 하다가 싫어져서 바이올린으로 바꿨는데, 그렇게 한 3년 피아노를 안 치다 다시 칠 때 재미가 붙었다. 운 좋게 음악 대학에 들어가게 됐고, 거기에서 배운 레슨은 질이 달랐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배우다가 좋은 선생님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니까 정말 다르고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연습을 제대로 열심히 한 것 같다.

그런데 좋아하던 클래식 연주에서 재즈로 방향을 바꿨다. 재즈를 만나게 된 이야기가 궁금하다.


내가 손이 작다 보니 클래식 연주가 힘든 게 있었다. 옥타브 잡는 것도 남들에게는 쉬운데 나는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그만둔 거 같다. 그 뒤 교회 반주자로 활동했는데, 그걸 좀더 잘해 보고 싶어서 실용 음악 학원을 다녔다. 버스를 한 시간 반 타고 시내로 나가야 했는데, 그곳에서 블루스를 배웠다. 그렇게 시작됐다.

블루스나 재즈를 접하면서 그전에 배운 피아노하고는 다른 매력이나 재미를 느꼈나?


그것도 역시 울림인데, 코드의 울림이 좋았다. 메이저면 메이저의 울림, 도미넌트면 도미넌트의 울림. 블루 노트라고 하는 그 음도 얘는 뭐길래 왜 이런 느낌을 줄까 하면서 되게 신비롭게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코드가 있다면?


도미넌트 세븐. 1, 3, 5, 7 음만 딱 짚는 정직한 도미넌트 코드를 가장 좋아한다.

재즈에서 사용하는 음악 이론도 결국 클래식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있다. 클래식에서 재즈로 방향을 바꿀 때 어떤 차이를 느꼈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차이는 리듬인 것 같다. 같은 음을 쓰지만 그 사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장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각 장르가 가진 고유한 역사 같은 것에서도 차이가 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자료를 찾아보면 유학 시절에 아프리카계 교회에서 반주한 경험이 꼭 등장한다. 뭔가 비범한 유학 생활을 보낸 듯한데,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유학생 시절 돈도 벌어야 해서 교회 반주를 소개받았는데, 그게 나이지리아인 교회였다. 연주를 하러 가니까 나랑 드러머 밖에 없었다. 심지어 악보도 없었다. 노래하는 사람이 뭘 부르면 내가 작곡을 하면서 연주를 해야 했다. 재즈 같은 노래도 아니고 간단한 화성 안에서 해결되는 곡인데, 거기에서 연주하면서 리듬에 관해 많이 배웠다. 그런 연주에서 사실 악보 같은 건 좀 부차적이다. 내가 다닌 교회는 막 누구 생일이라 그러면 교인 전체가 나와서 원을 그리면서 도는데, 그렇게 예배가 세 시간을 넘어가기도 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정말 자연스럽게 춤과 노래가 남아 있더라. 그때 많이 배웠다.

교회 반주 말고 또 다른 인상 깊은 유학 시절 소리 경험이 있다면?


내가 원래 흑인 음악을 많이 좋아해서 그때 학교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 흑인 아저씨들이랑 긱을 하고 다녔다. 그 아저씨들이 뽑는 공연 목록이 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음악들인데, 정말 처음 들어보는, 진짜 그 사람들만 아는 그런 음악이었다. 그런 음악들 카피하면서 같이 연주한 경험이 정말 좋았다.

실제로 남메아리 음반을 들어보면 흑인 음악 정서가 강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흑인 음악이 음악적 뿌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음악에 인종 개념을 들이대는 방식을 이상하다고 느끼나?


재즈 자체가 미국 흑인들의 음악이긴 하니까 그런 부분이 있을 거다. 사실 그 부분에 있어서 좀 양가감정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진짜 나의 블루스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흉내 내는 사람 중에 하나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어쨌든 나는 한국 전통 음악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들어온 음악으로 공부를 하는 거니까 이걸 자연스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거다. 근데 뭐 마일스 데이비스도 태생이 부자여서 사람들에게 부자는 블루스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너무 멋지게 해냈지 않나. 그런 데서 용기를 얻곤 하다. 한국인이고 아시아인이지만 이 장르 안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블루스 곡을 많이 발표했다. 남메아리를 한국 최고의 블루스 피아니스트라고 꼽는 사람도 있다. 동의하는가?


동의를 할 것 같나?


블루스를 음악 이론으로 접근하면 1, 4, 5도 도미넌트 코드를 사용하는 12마디 구성의 음악, 뭐 이런 이야기를 처음 배우게 되는데, 실생활에서 블루스라는 말은 그런 개념보다 훨씬 넓게 통용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 제목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고. 남메아리에게 블루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하다.


나로서는 대답하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멀어지는……그런 느낌이다. 사실 블루스 음계를 쓰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자꾸만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려워진다. 내가 거기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고 길거리에서 배우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노래로 블루스를 접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따라잡을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이 스스로 용납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연주를 모니터링해 보면 좋은 부분도 당연히 많은데, 나만 아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해결할지 항상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이건 나에게 맞지 않는구나 하고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계속 그걸 붙잡고 있는 것은 순수한 애정 때문인가?


그렇다. 연습할 때 행복하고 그래서 하는 것 같다.

남메아리 1집에서 녹음한 블루스와 얼마 전에 발표한 남메아리 밴드 2집에 실린 블루스는 어떻게 다른가?


확실히 연주가 편해졌다. 1집 때 녹음한 곡들은 한 곡을 위해 1년 반에서 2년을 연습했다. 그때는 내가 늘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서 두려웠는데, 지금은 옆에 피아노가 있으면 언제든지 칠 수 있게 됐다. 그것만 해도 나에게는 큰 의미다.

다음 주제는 즉흥 연주다. 즉흥 연주는 재즈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사실상 연주자마다 독특한 해석을 담은 즉흥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재즈를 듣는 이유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즉흥 연주에서 남메아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래하듯 연주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근데 노래는 기본적으로 말이어서, 그 말에 소울(Soul)이 담겨 있는지 아닌지가 느껴진다. 연주자들마다 많이 와본 길, 편안한 길이 자기한테 다 있는데, 그 길을 영혼 없이 가고 있을 때 매너리즘처럼 들린다. 어제 간 길이라도 오늘 또 소중하게 다뤄야 되는데, 인간이니까 이게 잘 안 된다. 정말 하나하나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즉흥 연주 중에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을 하는 편인가?


녹음인지, 공연인지, 솔로인지, 밴드인지에 따라 좀 다른 거 같기는 한데, 사실 생각을 안 하는 게 가장 좋은 연주일 것 같다.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자꾸 생각이 많아진다.

재즈에 틀린 음이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동의하는가?



틀린 음은 없지만 (알)맞은 음은 있을 것이다.

보통 틀린 음이라는 게 조성에서 벗어난 음을 말하는데, 클래식 역사에서도 조성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있었다. 남메아리의 〈Dusk〉 시리즈를 들을 때도 뭔가 이 곡을 조성으로 분석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 음악과 아방가르드한 재즈가 공유하는 지점도 많은 것 같다. 조성은 얼마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아웃사이드 솔로를 할 때 돌아가야 할 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한다. 정말 자유로운 현대 음악 즉흥 같은 경우는 몇 번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지만, 내가 직접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다만 〈Dusk〉 시리즈를 녹음할 때는 아예 조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근데 하고 보니 길이 만들어진 경우다. 그런 건 정말 로또처럼 다가온다. 막상 그렇게 한번 하면 다음번에 잘 안 된다. 내가 생각 없이 한 그 연주를 다시 카피하려고 해서 막히는 거다. 그럼 또 그거를 깨려고 노력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실력이 느는 것 같다.

다음은 피아노 소리에 관한 질문이다. 사실 피아노는 그냥 누르면 소리가 나는 악기이고 전기 회로를 통하는 악기도 아니라서 거기에서 톤을 만든다는 게 뭔지 이해가 어려운 구석이 있다. 연주자로서 좋은 피아노 톤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같은 피아노를 갖다 놓고 같은 곡을 여러 사람이 쳐보면 톤이 확 드러난다. 내 기준으로 좋은 피아노 소리는 따뜻하고, 단단하고, 두텁고, 그러면서 테크닉적으로 다이내믹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소리다. 질문한 것처럼 피아노는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가 나는 악기이기 때문에 소리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 생각을 잘 안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레슨 현장에서도 그 부분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그 좋은 소리를 내는 연습법 같은 게 있을까?


일단 클래식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다. 그다음에 도 하나를 잘 내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써보는 거다. 인상도 써보고, 내 몸에서 할 수 있는 걸 짜내 보면서 어떤 게 도움이 되는지 찾아보는 거다.


그 접근은 디지털 피아노가 아니라 진짜 어쿠스틱 피아노에 해당하는 말인가?


되게 핵심적인 질문이다. 연습실 환경이 다르기 떄문에도 그렇겠지만, 요즘은 다 키보드로 연주를 해서 누가 만들어 준 소리를 내가 그냥 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톤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놓칠 수도 있고, 서스테인 페달 사용에 관한 감각도 둔해질 수 있다. 그래서 시작은 어쿠스틱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울림을 스스로 느끼면서 만들어야 한다. 서스테인 페달을 쓸 때도 큰 차이가 있다. 요새 어떤 연주자들은 어쿠스틱 피아노가 부담스러워서 좋은 피아노가 옆에 있는데도 키보드만으로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피아노는 사실 굉장히 역사도 오래되고 악기 자체의 제한도 분명하다.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 음이 분명하게 조율돼 있어서 현악기처럼 미분음을 지나갈 수도 없다. 그 고전적인 형태 안에서 피아노가 남메아리에게 주는 매력이 있는가?


사실 나에게는 피아노보다는 음악이 주는 매력이 더 중요하다. 정말 좋은 공연을 볼 때면 나를 다 잊게 되고, 그 멜로디를 쫓아 어딘가로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게 참 좋다. 그 멜로디에 사로잡혀서 내 마음이 어디로 가 닿을 때 느끼는 행복감 때문에 공연을 보는 걸 좋아하고, 내 연주도 그 순간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 그 순간을 위해서 계속 연습을 하는 거 같다.

혹시 정말 싫어하는 소리도 있는가?


칠판 긁는 소리, 자동차 브레이크 잡을 때 나는 끼익하는 소리, 귀를 피로하게 만드는 그런 소리는 싫어한다. 핸드폰 통화도 귀가 힘들어서 자제하는 편이다.

다음은 시대에 관한 질문이다. 장르 음악이 지닌 특성상 과거 어떤 시대의 음악을 배우고 복제하는 훈련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과거의 소리를 똑같이 재현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현재의 연주자마다 부여하는 의미가 다를 것 같다. 음악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재즈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칭찬이고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모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남메아리에게 과거의 음악, 유산이란 어떤 의미인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어차피 내가 하는 음악은 빌려 온 것이고, 나는 그 울림 자체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다. 내가 그 블루스의 자연스러움을 이번 생에서 한 번이라도 해낼 수만 있으면 바라는 게 없다. 음악 스타일 면에서 보면 내 것을 정립하려면 과거의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비밥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으려면 비밥을 먼저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중에서도 남메아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시대 또는 장소가 있는가?


뉴올리언스 출신인 제임스 부커라는 뮤지션이 있다. 1939년에 태어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실제로 그 사람 스타일을 많이 흉내 내기도 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사람이 활동하던 그때의 뉴올리언스에 꼭 가보고 싶다.

마지막은 상상력이 필요한 질문이다. 어떤 사람의 무의식이 내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마이크가 있다면 어떤 소리가 녹음 될 것 같은가?


야외에 있는 넓은 무대에서 울리는 노래 소리라면 좋겠다. 마이크나 스피커가 없어도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운 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