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소
(가야금 연주자)

“본 음원은 주로 점잖은 고전음악을 플레이 해주는 한국의 라디오 방송이다. 주파수 93.1MHz에서 플레이 되던 이 음악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수정이 되고 착상이 된 후, 심지어 청력을 갖게 되기 전부터 가장 빈번히 들은 것으로 매체의 특성상 나름 대중성을 겸비한 음악들이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들었던 것이지만 현재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데에 큰 거름이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디오를 들을 때 나는 지금도 이 채널로 주파수를 맞춘다. - <박경소가 보내준 음원은 KBS Classic FM의 주파수다.>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자랐는가?


늘 음악을 듣고 자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안에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대개 라디오를 켜놓고 살림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방송(KBS) 클래식 에프엠 라디오 같다. 그 음악 소리가 나중에 연주를 하고 작곡을 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이미 악기의 소리와 곡의 구조, 음이 어떻게 음에 연결되는지 머릿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몇 살 정도 때 기억인가?


어린 시절 내내 그래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중학교 때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전까지 쭉 그렇게 음악을 들었다.

실제 악기 소리를 들은 경험은 없었나?


이모가 가야금을 연주하시기는 했지만, 이모는 대구에 사시고 나는 서울에 살아서 자주 보지는 못했다. 물론 가족들이 만나는 자리가 있을 때는 종종 악기를 연주하기는 했다. 가장 많이 들은 건 내가 연주한 피아노와 가야금 소리 같다.

처음 시작한 악기가 피아노라고 알고 있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난다. 한글을 익히기도 전에 시작했으니까 아마 세 살쯤부터 아닐까? 어머니께서 작곡과를 졸업하신 분이다 보니 피아노를 일찍 가르치신 것 같다.

피아노에서 가야금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다면?


피아노를 엄마한테도 배우고 선생님들한테도 배우다 보니 너무 어려웠고, 못할 때 혼나는 게 무서웠다.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첼로를 배워 봤는데 그것도 어쩐지 내 몸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찰현 악기가 나랑 안 맞았나 보다. 그 뒤로 이모가 하는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했고, 열 살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악기를 상당히 오랫동안 연주했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특별한 관계나 관점이 만들어질 것 같다. 악기 연주란 박경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서양 악기를 하다가 처음 가야금을 접한 때는 정말 대 충격이었다. 악보대로 연주하는데 예상하는 소리가 나지 않고 다른 소리가 나고 연주할 때마다 음정이 바뀐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런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에게 악기는 일종의 도피처였고,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나만의 세상이 생기는 것하고 같다. 결국 연주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어떤 악기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산조부터 현대 음악까지 정말 많은 작업을 해왔는데, 신기하게도 현대 음악 트리오 ‘아우라’로 데뷔하고 뒤늦게 가야금 산조 음반을 발표했다. 어쩌면 전통 음악가에게 낯선 세계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음악 작업에 애정을 느낀 이유가 궁금하다.


가야금을 시작한 뒤로 학교 다니는 동안은 쭉 전통 음악만 했다. 전통 음악은 수련의 음악이라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해야 조금씩 공력이 쌓인다. 반면 현대 음악은 연습하면 하는 대로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그걸 확인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연습 과정이 어렵기는 한데 어느 순간을 넘어가면 정말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좋아한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음악 문법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박경소만의 관점이 있나?


국악 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화성에 약한 면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화성적인 접근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모의 가야금과 내가 피아노로 연습한 바흐 그런 게 다 익숙하다 보니 다양한 음악 문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실 가장 익숙한 음악은 성당에서 들은 미사 음악이고, 부모님이랑 시골집 내려갈 때는 카펜터스(Carpenters)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José Iglesias) 같은 옛날 팝송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동서양을 떠나서 내가 연주해야 하는 음악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동물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그중에 특별히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음악이 있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바흐다. 푸가나 인벤션 같은 수학적인 음악들.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바흐의 곡을 많이 연습했다. 이상하게 고전 음악 중 모차르트의 곡은 바로 외우기가 어려웠는데, 바흐 곡은 한 번 치자마자 바로 외울 수 있었다.

아우라로 활동하다가 20대 후반에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경험했다. 한국에 있을 때하고 다르게 배운 것은 뭔가?


한국에서 클래식부터 현대 음악까지 나름 다양한 음악을 경험해서 어디를 가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즉흥 합주를 할 때 내 예상이랑 너무 달랐다. 아무런 악보도 없는 즉흥이고 내 기준에서는 엉망진창인 연주가 나왔는데, 사람들은 굉장히 좋은 시작이라며 오히려 좋아했다. 그곳에서 음악을 결과로 생각하지 않고 과정으로 쌓여 가는 관점에 대해서 크게 배웠다. 그전까지는 어떤 곡을 잘 연주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직선으로 연습해 왔다면, 그거 말고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내 음악을 오스트리아 레지던시 전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음악이 과정으로 쌓여 간다는 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


예를 들어 다양한 나라의 음악가가 만나서 합주하면 정말 다양한 음색이 모이게 된다. 외국인들이 우리 국악기인 생황과 해금의 음색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외국 악기의 음색을 잘 모른다. 그 악기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 내 앞의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낼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 그걸 예상하려 하지 말고 그냥 듣고 흘려보내면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거다.

1집 《이것은 가야금이 아니다》와 2집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음악적 방향성이 굉장히 다르게 느껴진다. 2집에서는 뭔가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영향도 느껴진다. 해외 레지던시 경험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낸 걸까?


그렇다. 오스트리아와 미국, 그리고 홀로 외국으로 투어 공연을 다니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이 모두 2집에 담겨 있다. 1집은 그동안 내가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가야금 줄을 직접 튕기면서 만든 음악인데, 어린 시절에 작업한 만큼 단순한 접근법이었다. 2집에서는 나에게 집중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까지 시선을 확장하게 된 점에서 굉장히 다른 작업이었다.

소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연주와 작곡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리가 있는지 궁금하다.


음색.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음색과 거기에 더해지는 기운이다. 둘 다 악보에 표기되는 것이 아니다. 가식적이고 꾸며내는 게 아니라 편안하고 솔직한 나만의 음색을 내려고 한다. 꼭 예쁜 음색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정직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솔직한 소리다.

곡을 창작할 때는 어떻게 시작하는지 궁금하다. 악보로 작업하는 사람, 컴퓨터로 하는 사람, 사람에 따라 다 다를 텐데, 연주자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창작의 첫 단추는 뭔가?


내가 습관적으로 내던 소리부터 시작한다. 산조를 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줄을 고르며 음정을 맞추는데, 그때 손가락의 습관과 패턴에서 음악이 시작되는 것 같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분들은 또 다르겠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가 있다. 그런데 연습하다 보면 무의식에서 시작하는 지점이 매번 다르다.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가 늘 비슷하면 결국 재미없고 스스로 지루한 음악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곡을 쓰려면 연습도 많이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주로 어떤 연습을 하는가?


라디오 아침 방송 일을 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산조를 탔다.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연습한다. 메트로놈 켜두고 박자에 맞춰서 손가락으로 뜯는 소리, 튕기는 소리를 내는 연습이다.

이 인터뷰의 키워드는 동시대성이다.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동시대적인 소리들이 어디에서 온 것이고 우리는 그 소리들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다. 박경소가 생각하는 동시대성, 혹은 동시대의 키워드가 있는가?


내게 동시대적인 것은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음악,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 지금 발생하는 사건과 사고들이다. 지금 나의 동시대적인 키워드라 할 때는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을 제외하고는 당장 떠오르는 게 없기는 하다. (웃음)

약간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겠다. 100년 전의 가야금 연주자와 지금의 가야금 연주자는 어떻게 다를까?  


옛날에는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했고, 성별에 따른 한계도 있었을 거다.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용기 있게 소리 낼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가야금을 하고 있다.

많은 음악가가 오래전에 만들어진 음악 문법과 테크닉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자기가 하는 음악에 어떤 시간과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상상을 한 적 있는가?


늘 상상한다. 특히 산조 연주를 잘할 때면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레슨을 해주신 선생님은 그분의 선생님께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걸까 상상하기도 한다. 전통 음악은 스승과 제자 관계로 전승되는 음악이다 보니 내가 지금 배우는 이 소리가 저 멀리 누구에게서 온 걸까 생각한다.

음악가로서 애정을 가진 특정한 시대가 장소가 있나?


어떤 시대나 공간을 특별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웃음) 국악기를 하기 때문에 이국을 향한 동경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특정한 시대를 향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게 부러울 때가 있다.

문묘제례악을 테마로 드러머 김책하고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제례악은 산조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음악인데, 그런 음악을 연주할 때는 어떤 기분인가?


시대를 느낀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일단 황홀한 느낌이 든다. 보통 솔로 활동을 하고 현대 음악을 하니까 궁중 음악을 연주한 경험이 많지는 않다. 국립국악원 연주자들은 그런 느낌을 매번 받지 않을까 싶다. 그 작업은 뭔가 유교의 맛을 제대로 보여 주자는 포부로 접근했다. (웃음) 어찌 됐건 조선 사회가 유교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고, 중국 공자의 음악이란 바로 이렇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지금 시대에 유교와 공자를 음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굉장히 비동시대적인 사건처럼 들린다. 박경소의 음악 안에는 유교와 공자가 담겨 있나?


2집 음반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준비할 때 한창 《논어》를 읽고 있었다. 《논어》의 기본 개념이 너와 나는 다르지만 모두 화합해야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거다. 그런데 그 화합에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음악이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됐다. 지금 시대에서는 유교라는 말이 자기 편할 대로 곡해되는 것 같다. 사자성어로 박제돼 어른은 무조건 공경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박경소가 지닌 음악적 자양분 중에 유교 말고 또 다른 시대에서 온 재료도 있는가?


한때 모노포니(monophony)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정말이지 천사의 노랫소리 같다. 집안에 수녀님이 계시기도 하고 성당에서 미사곡을 많이 듣다 보니 종교 음악에 상당히 익숙하다. 2017년에 가야금으로 성가를 연주한 음반을 냈는데,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는 오래된 음악을 선정해 편곡해야 했다. 수녀님들하고 함께 오래된 성가를 찾아 들으면서 작업했는데, 엄청난 역사를 가진 유럽 음악을 한국 전통 악기로 편곡하고 연주한다는 경험이 개인적으로 정말 특별했다.

마지막으로 가상의 질문을 던진다. 박경소가 지금껏 들어온 모든 소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가있다면 어떤 소리가 녹음될 것 같은가?


어릴 때 어머니가 틀어 놓은 에프엠 라디오 소리일 것 같다.